응관(應觀), 72.7 x 53.3 cm, Oil on linen, 2024 사진 양승욱
나의 바람은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간다” 라는 말을 어린 시절 책에서 본 후로 항상 마음에 담고 살아왔었다. 언젠가 항상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는 내게 주어진 것이 아닌데 바라는 것은 염원이 아니라 욕심인 걸까, 라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지금의 모습은 욕심부린 것에 대한 대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이제는 모두를 위해 기도하고 자유를 염원한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훌훌 날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홍예지: 정말 말 그대로 이안은 여러 가지 눈일 수 있겠네요. 그리고 이제 피안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아까 말씀해 주신 것처럼 금융계라고 해야 될까요? 이쪽 세계가 돌아가는 법칙과 여기 계신 분들이 세상의 가치를 판단하는 눈, 그리고 작가님이 예술계에서 활동하시면서 자신의 작업 세계를 만들어 가면서 바라보는 눈은 또 다른데, 이 서로 다른 눈들이 만났을 때 정말 다른 세상끼리 만난 것처럼 느껴질 것 같거든요. 근데 전시명 안에 들어가 있는 피안이라는 것도 말 그대로 저쪽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고, 사실 불교적인 색채가 짙은 용어인데요. 이 피안이라는 말을 통해서 이번 전시에서 어떤 얘기를 펼쳐 나가고 싶으신지 묻고 싶어요. 또 작업 안에 속세에서 초탈한 듯한 불교적 세계관이 본격적으로 들어간 작업도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혜향 혜령: 이번에 같이 보여주는 신작이 그런 내용이 담겨 있는 작품들이에요. 제가 종종 불화를 유화로 그리는 작업도 해 왔는데, 어떻게 하면 더 그런 정신적인 것을 제 작업과 융합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제가 글자를 이용해서 추상적인 작업을 하는 시리즈와 불교적인 것을 결합시켜서 작업한 것들을 이번에 같이 선보여요. 서로 다른 세상을 피안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불교 용어로 깨달음을 얻는 것을 말할 수도 있어서 관람객에게 어떻게 느껴질지 궁금해요. 저는 알잖아요. 이게 종교적인 내용을 품은 그림이다. 근데 그 맥락을 모르시는 분들이 보셨을 때 그런 걸 느끼실지, 아니면 그냥 수상하네, 그냥 뭐 글씨가 있는데 안 보이네, 이렇게 생각하실지. 그래서 전시장에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 정말 궁금했어요.
홍예지: 따로 명시적인 설명이 없어도 그런 정신적인 에너지를 느끼실지. 지금 말씀해 주신 것과 연결해서 질문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신작에 ‘발현’이라고 제목을 붙이셨고, 그 시리즈를 작업하실 때 글씨들을 계속 반복해서 새기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작품에 들어가는 문구의 내용이라든가 의미도 살짝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
지혜향 혜령: ‘관세음보살’이라는 다섯 글자를 계속 반복했어요. 어릴 때부터 저는 외가 쪽이 불교 집안이어서 할머니랑 엄마를 따라서 종종 절에 가고 가끔 봉사활동도 하고 그랬었는데, 항상 그 말씀을 해 주시더라고요. 힘들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관세음보살님을 찾으라고. 그냥 주문을 외우듯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면 도와주신다, 그런 말을 어릴 때부터 들었어요. 그래서 절에 다니지 않고 믿지 않아도 그냥 어느 순간 저도 이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심지어 제가 중학교 때 가위에 눌렸는데 꿈에서 관세음보살이라고 했어요. 근데 귀신이 저한테 욕을 하더라고요. (웃음)
홍예지: 아 진짜요?
지혜향 혜령: 제가 그때는 너무 믿음이 없이 말을 해서 그랬는지. 근데 실제로 말하면서 저도 조금 힘을 얻기도 하고 도움을 받았던 적이 있었어요. 이제 저는 다른 분들을 위한 마음도 갖고요.이 그림을 보시는 분들이 행복해지시고 원하시는 대로 다 됐으면 좋겠다, 다 건강해지시고. 저는 나름대로 좋은 마음을 담아서 그렸는데 어떨지 모르겠어요. 그림을 보시는 분들도 좋은 에너지와 영향을 받아 가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요.
홍예지: 말씀 듣다 보니까 얼마 전에 같이 얘기 나누기도 했는데 방혜자 화백이 생각나요. 그분도 점 하나하나에 염원을 담아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린다고 하셨거든요. 작가님께 염원이란 무엇인지 궁금해요. 기도하는 마음의 효과를 평소에 어떤 식으로 체험을 하고 계시는지, 작업할 때 느껴지는 어떤 내적인 움직임이 있으신지 묻고 싶어요. 스스로 힘을 받는다고도 하셨는데.
지혜향 혜령: 기도하면서 작업을 할 때는요, 사실 작업에 집중이 잘 되고요. 저도 모르게 엄청 빨리 진행이 돼 있어요. 제가 조금 피곤하거나 생각이 많은 날은 아무리 작업을 해도 잘 안 돼요. 너무 더디고 몸이 너무 무겁고 힘들어요. 근데 기도하면서 그릴 때는 힘도 많이 안 들고 ‘언제 내가 이렇게 다 했지? 너무 빠른데, 나 괜찮아?’ 이럴 때도 있어요.
홍예지: 신기하네요.
지혜향 혜령: 이전에는 색깔을 쌓아서 수행하는 작업을 했다고 하면, 이제는 색깔 말고도 이런 게 직접적으로 들어오니까 뭔가 달라지는 느낌이 들기는 해요.
홍예지: 실제로 작업 속도 면에서 차이가 난다고 하니까 신기하네요. 마음 상태의 차이가 드러나는 거죠.
지혜향 혜령: 방혜자 화백의 책에 같은 얘기가 있더라고요. 하느님, 부처님, 어느 신이든 상관없이 본인을 이용해서 작업을 하려고 하셨나, 그런 내용이 나오더라고요.
(방혜자, 『마음의 침묵』, (주)여백미디어, 2001, p.43.)
홍예지: 자연스럽게 그림 그리는 과정에 대한 얘기를 계속 나누고 있는데요. 이번 전시에 다양한 시리즈의 작업들이 총망라돼서 나오잖아요. 어떤 주제나 겉보기에 보이는 효과나 이런 건 달라지더라도 작가님 작업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작업 레이어들, 절차나 방법론이 있을 것 같아요. 혹시 그 부분도 설명해 주실 수 있어요?
지혜향 혜령: 저는 작업을 할 때 레이어를 굉장히 많이 쌓아요. 베이스를 보통 그 작업을 할 때 제 나이만큼 쌓아요. 그래서 어떤 것은 젯소만 그 나이만큼 칠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젯소도 그 나이만큼 하지만 색깔도 그 나이만큼 해요. 예를 들어 35세에 그 작업을 했으면 레이어만 한 70개가 쌓일 때도 있어요. 그래서 기본 베이스 작업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제가 더 성실하게 작업하려는 것도 있어요. 그게 보실 때는 잘 모르실 수도 있지만 그런 보이지 않는 작업이 있어요.
홍예지: 근데 느껴지는 것 같아요. 작품의 맨 아래 층위를 제가 볼 수는 없지만, 겹겹이 쌓아서 만들어진 바탕이라는 게 느껴지거든요. 그러니까 단순히 몇 번 칠해서 만든 색이라든가 잔상이라는 느낌이 아니고 오묘하게 배어 나온다고 해야 될까요? 겉보기에 흰색, 회색에 가까운 바탕색이라 하더라도 그 아래 언뜻언뜻 비치는 보라색, 붉은색, 녹색이 절묘하게 혼합되어 흰색으로 비치는 느낌. 그래서 정말 깊은 느낌이 들거든요. 시간의 밀도일 수도 있고. 그리고 2023년에 『녹음』 시집 표지 콜라보 하셨잖아요. 시인과 토크 하실 때 원화를 어떻게 완성했는지 여쭤봤더니 이 시인의 나이만큼 바탕을 쌓아 올렸다고 하셨던 기억이 나요. 시인이 유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거쳐 오면서 겪었을 시간을 생각하면서 레이어를 쌓았고, 사람의 피부를 만든다는 느낌으로 작업하셨다고 했죠. 그때 정말 놀라웠어요. 그렇다면 이 그림은 정말 그 사람 자체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림이 사람이라면 그림의 가장 겉모습은 피부일 수 있겠고, 우리가 사람 피부를 볼 때 그냥 살색이 아니라 되게 다양한 색이 섞여 있어서 그림으로 살색을 표현하는 게 제일 어렵다고 하잖아요. 피부 안에 붉은 기운도 돌고 초록빛 혈관도 비치고 사람마다 다 다르다고. 저는 작가님의 그림에서 바탕이 그렇게 느껴지는 거예요. 사람 피부처럼 오묘한 생명력이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홍예린, 『녹음』, 아름다움 출판사, 2023
홍예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작업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그렇다면 그림의 몸 안에 분명 영혼이나 정신적인 것도 깃들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사람의 겉모습과 속마음을 궁금해하듯이 작가님의 그림에서도 겉모습과 속마음이 있을 것 같은데, 이제 제가 궁금한 건 속마음에 대한 것이거든요. 작가님은 관람객들이 그 속마음을 어떤 식으로 추리하면서 보았으면 좋겠는지 궁금해요.
지혜향 혜령: 저한테는 그림이 대나무 숲이에요. 그때그때 그림 속에 남겨지는 게 다를 거예요. 어떤 날은 화가 나서 막 이 색을 넣기도 하고 이날은 너무 좋으니까 이걸 넣기도 하고. 그리고 관람객들이 보실 때는 그냥 새로운 사람을 만나듯이 보셨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새로 누군가를 만날 때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그 사람을 보잖아요. 그것처럼 보시면 되지 않을까요?
홍예지: 그러네요. 사람 만나듯이. 첫인상에서 바로 느껴지는 것도 있고 조금 시간이 지나야 느껴지는 것도 있고 안 보이는 것도 있고. 그냥 그 상태를 온전히 즐기는 느낌으로. 낯선 사람을 처음 만나 보는 느낌으로. 마침 대나무 숲을 소재로 한 글도 쓰셨잖아요. 「무엇이든 담아드려요」라는 제목의 글이었죠. 작가님의 그림이 작가님의 대나무 숲이기도 하네요.
지혜향 혜령: 네. 그림 그릴 때는 일기 쓸 때보다 솔직한 것 같아요. 일기 쓸 때는 적절한 단어를 막 생각해 내려고 하잖아요. 근데 그림은 정말 그냥 속으로 같이 얘기를 하면서 내면에서 대화가 이루어지는 느낌이에요.
홍예지: 필터링이 좀 덜 되겠네요. 아까 진실성 얘기하셨는데 그것도 연관되는 것 같아요.
지혜향 혜령: 맞아요.
홍예지: 이제 마지막 질문인데요. 제가 느끼기에는 작가님의 작업이나 말씀해 주신 것들에서 이 삶을 부정하고 떨쳐 버리기보다는 나름대로 매일매일 성실하게 긍정하면서 살아가는 태도가 느껴졌거든요. 고통스러운 날도 있고 아픈 날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듯이, 또 이왕이면 좋은 마음을 담아서 그리듯이, 뭔가 삶을 긍정하는 작가님만의 방식이 있을 것 같아요. 한마디로 작가님의 가치관이나 삶에 대한 태도를 정리해 본다면 어떤 키워드들이 나오게 될지 궁금해요.
지혜향 혜령: 너무 어렵네요. 받아들이기 나름인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우주적인 관점에서는 먼지만 하고 엄청 짧은 순간일 수도 있는 건데 우리는 살면서 엄청 길다고 느끼잖아요. 그게 어떻게 보면 재밌고. 상황이 어렵고 너무 힘들어도 ‘어차피 이거 지나가면 나중에는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을 거고 잘 버텼다고 할 건데 내가 왜 이렇게 지금 힘들어 해야 돼?’ 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차피 내가 감당할 수 있으니까 나한테 일어난 거 아니겠어?’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아요. 엄청 힘든 일을 겪었을 때도 빠져나오기가 힘들었는데 ‘지금 이걸 잘 풀고 지나가면 다음이건 다다음이건 더 좋은 일들, 더 좋은 인연들이 생기지 않을까? 나한테 주어진 것에서 그냥 최선을 다하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딱히 욕심은 없는데 그나마 책 수집하고 보는 거랑 전시 보고 싶은 거 봐야 되는 그런 욕심은 좀 강해요. 그리고 작업 재료에 대한 욕심도 있고. 그것 외에는 ‘그러려니’ 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해요.
홍예지: 어떻게 보면 되게 심플한 것 같아요. 딱 중요한 것만 지켜 가고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넘어가고. 그런 태도가 있어서 이렇게 왕성하게 작업을 이어 가실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지혜향 혜령: 욕심 부려서는 될 것도 안 되는 것 같아서.
홍예지: 그런 것 같아요. 진짜 욕심이 일을 그르치는 것 같아요.
지혜향 혜령: 그냥 하다 보면 언젠간 되겠지. 흐르는 대로 가자. (웃음)
홍예지: 오늘 인터뷰는 여기에서 마무리할까요? 감사합니다.
-지혜향 혜령 초대전 《이안피안(異眼彼岸)》 인터뷰 중 발췌 (일시: 2024. 6. 10. 오후 3-4시, 장소: DB Alpha+ Club 라운지, 인터뷰어: 홍예지 기획자, 인터뷰이: 지혜향 혜령 작가)
전시전경 @DB 알파플러스클럽
사진:양승욱